2016.01.29 23:58
48. 유학
1967년 초에 나는 대학 교수로서의 스펙을 옳게 갖추고 있는가를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아직도 집안에는 대학생 둘과 고교생 둘을 포함해 생활마저 넉넉지 않아 나만의 영달을 위하여 유학의 길을 택하는 것은 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음속으로는 몇 해를 뒤로 미루어 다시 기회를 보자는 마음을 굳히고 있던 무렵, 학장 Nichols 수녀가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이 아닌가? 석사 과정에 소요되는 2년 동안 봉급을 전액 주고 미국의 미시간주의 모 주립대학교의 전액 장학금을 확보해 놓았으니 안심하고 다녀오는 것이 어떠냐? 라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제안이었다. 가족회의는 물론 주변의 모든 친지들이 축하해주는 가운데 나는 유학행의 길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 . . .
여권 신청 시 반드시 거쳐야하는 경찰과 병무청에서 제동을 걸어 유학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가 월북한 빨갱이 집안에다 병역 미필자로 부적격하다는 판정이었다. 앞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최병철이 유학 간다는 소문은 왜 그리 빨리 퍼졌는지, 얼굴을 들고 밖에 나가기조차 못할 지경이었다. 이 문제를 봄방학 동안에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소문난 대 지주셨기 때문에 납치되어 끌려 가셨는데 왜 빨갱이냐? 그 때문에 어머니 하고 형이 내무서(경찰관 파출소의 북한 용어)에 매일 잡혀가 얼마나 많은 고문을 당했는데.”
하고 나는 애걸복걸하며 십여 일 간 매일 성북경찰서를 찾아갔다. 그러던 중 저 안에 있던 경찰관 한명이 내게로 다가서면서
“너 병철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어, 형이 어떻게 여기 . . . .”
아랫동네 살던 충진이 형이었다.
충진이 형은 나를 담당했던 경찰관에게 우리 집안 이야기를 자세히 하며 내 보증인이 되어주었다.
이젠 병무청이 문제다.
나는 매일 아침 후암동 비탈길에 있는 병무청엘 갔다. 동네 의원에서 진단서와 원장 선생의 의견서를 만들어가지고 나의 소아마비 병력을 되풀이하며 졸라댔다. 사무를 보던 사람은 군인이었는데 마치 돌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흘째 날 아침이었다. 건장한 체구의 군인이 정문을 들어서자 사무실 안의 모두가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하며 우렁차게 ‘충성!’ 하는 것이었다. 얼른 보니 그 군인은 해병대 소장이었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순간 나는 저 높은 군인에게 떼를 써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재빨리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빨리 서두는 내 걸음걸이가 우스웠는지 사무 보던 병사는 나를 그냥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내가 그 높은 군인을 따라 들어간 방은 바로 병무청장실이었다. 그는 황금빛 찬란한 별 두 개가 번쩍거리는 철모와 탄띠를 벗어 내려놓고 큰 책상 의자에 앉았다. 나는 염치불구하고
“청장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누구신가요?”
나는 단도직입으로
“미국 유학 준비를 다 해놓고 여권을 발급받지 못해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유학? 여권이요?”
경상도 말투가 느껴졌다.
“예, 어려서 소아마비에 걸려 . . . . ”
나는 짧은 시간에 되도록 자세히 나의 병력을 설명하고, 그런데도 무종 판정으로 병역을 필하지 못 했으며, 해병 군악대 지원했던 이야기며, 한상기 군악대장 이야기를 했다. 청장은 내 이야기를 들으며 내 얼굴을 뚫어지도록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럼, 일어나서 한번 걸어 보시오”
“예, 발목 아래는 전혀 못 씁니다”
서너 발 정도 움직였을까?
“야, 이 사람 병적차트 가져와”
“예, 충성!”
사무 보던 병사가 나의 병적 기록부를 가지고 들어왔다. 청장은 그 기록부를 두터운 서류철에서 뜯어내어 찢어 버리면서
“이 사람 여권 신청서에 도장 찍어줘.“
“예, 충성!”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수가 . . . . 기가 막혀 얼떨떨한 나를 빙긋 웃으면서 바라본다.
“미국, 잘 다녀오세요, 공부 많이 하고 나라위해 큰일 하시기 바래요.”
“너무너무 감사해서 할 말을 잊었습니다.”
이토록 뭉클한 가슴, 눈물이 핑 도는 감정은 일찍이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으로 이 큰 은혜를 갚겠습니다.”
목멘 목소리,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청장의 부드러워진 음성이 재차 나를 감동케 했다. 그리고 그는 내 손을 꽉 잡았다.
“여기 서류는 새로 잘 만들어 놓을 테니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요”
?
나의 유학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다. 1967년 9월 4일 김포 공항 발 North West 여객기에 몸을 실은 내가 토쿄, 알라스카를 거처 20여 시간을 날아 Detroit 공항에 내렸을 때는 한 밤중이었다, 터미널을 오가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두 눈의 흰자위와 흰 이빨만 번쩍이는 흑인들이었고 희미한 불빛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 나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질적 문화권에 들어서는 최초의 경험이 시작됨을 실감하면서 Gray hound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도시 중심부를 통과하여 Michigan 주 중부로 이어지는 Free way로 접어들기 까지 창밖으로 보이는 Detroit의 거리는 참혹하리만큼 파괴되고 불탄 폐허 그 자체였다. 나는 옆 자리의 노신사가 <1965년에 일어났던 흑인 폭동이 이곳과 시카고 등 양대 도시를 이토록 큰 재난 속에 빠뜨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2년 전 신문에서 읽은 흑인 폭동 기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며 <큰 나라는 폭동도 크구나 . . . .>를 몇 번이나 뇌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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