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철 이야기1

2015.05.2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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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장교동과 광교

할아버지 최순영씨와 할머니 이성녀씨는 장교동(서울 장안의 광화문 근처에 처음으로 생긴 다리 근처)의 엄청나게 큰 부자셨다. 두 분께서는 슬하에 장녀 큰 고모, 아버지 4형제 그리고 막내 고모 등 6남매를 두셨다. 나는 그 셋 째 아들인 최익상씨와 어머니 박한라씨의 6남매(위로 3형제, 아래로 3자매) 가운데 둘 째 아들로 태어났다(1936128). 장교동 집은 안 체 60여 칸과 우물 둘, 그리고 사랑 체 40여 칸과 우물 둘 등 도합 건평 99 칸과 네 개의 우물을 갖춘 옛날식 단층 한옥이었다. 큰 고모는 광교(지금의 종로 보신각 뒤)의 격에 맞는 가문에 시집 가셨다. 우리 사촌 형제들은 장교동과 광교(서울 장안에 두 번째 생긴 종로 1가와 을지로 입구를 잇는 청계천의 다리) 사이를 오가며 어린 시절의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광교 아래에서는 형들이 청계천(‘맑은 개천이라는 뜻)에서 잡아 주는 고기들 가운데 붕어를 골라 큰 고모 댁 우물에 갖다 넣는 것이 대 여섯 살짜리 우리들이 하는 일이었다. 우물은 물의 공급원뿐만 아니라 냉장고로도 활용되던 시절이었다. 여름이면 민어 회, 고기, 수박 등을 큰 두레박에 담아 20여 미터 깊이의 우물 속에 채워 냉장 보관하는 것이었다. 큰 고모가 우물 속에서 꺼내 쓸어주시던 하얗게 김이 서린 수박은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했고 참으로 맛이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물놀이 대신 대청마루 위에서 공차기를 했다. 공은 야구공과 축구공의 중간 크기 정도의 쥐 색 고무공이었다. 사촌들 가운데 제일 어렸던 나에게 형들은 늘 꼴키퍼를 하라고 했다. 공차기가 지루해지면 우리는 제기차기로 종목을 바꿨다. 제기차기는 항상 개인전을 예선으로 시작 하고 최고 득점자 셋 혹은 네 명이 동네 제기로 마지막 승부를 가리곤 했다. 지는 편은 지난밤에 엽전에 헌 한지 책을 찢어서 정성 들여 만든 제기를 모두 빼앗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고 나면 할머니(장교동), 큰 고모(광교)께서는 손수 들기

름을 두른 큰 가마솥에 호박, 풋고추, 파 등을 채 썰어 얹어 부치신 밀전병과 감자전 등으로 우리 어린 것들의 배를 채워 주셨다.

서울시 돈암동 산 54번지 5

할아버지께서는 일찍 큰 아드님을 잃으시고 이곳에 집을 세 채 지으시어 나머지 세 아드님들에게 한 채씩 나누어 주셨다. 양주에 있는 땅도 5등분 하여 할머니, 병균이 형(돌아가신 큰 아버지 인상씨의 유복자 외아들), 봉상씨(두째 큰 아버지), 익상씨(아버지), 그리고 건상씨(작은 아버지) 에게 각각 십여 만석지기 정도씩 물려 주셨다. 돈암동에 나란히 들어선 세 채의 집들은 당시 개량식 한옥으로 백두산 홍송으로 지어 한껏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터였다. 그런데 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께서는 살림나시면서 문안의 원서동과 아현동으로 각각 거처를 정 하셨다. 그래서 가문에서 우리 집만이 유일하게 동소문 밖의 주소를 갖게 되었다. 이 주소는 1945,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울시 동대문구, 1952년경에 성북구 돈암동, 그리고 그 후 1970년대 언젠가 성북구 삼선동 산 54변지 5호로 바뀌었다. 분가하신 후 아버지께서는 우리 가족의 본적을 이 주소로 옮겨 오셨다.

아버지 최익상씨

아버지 최익상씨는 19111117알에 장교동 할아버지 댁에서 태어 나셨다. 광신상업학교(지금의 광신상업고등학교)를 나오신 아버지께서는 그 해에 화신상회(설립자; 박흥식)의 영업부 경리 사원으로 입사 하셨다. 당시 화신상회와 미스꼬시(동화?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하면 장안의 신식 명물로서 쌍벽을 이루던 고층 건물이요, 개화한 멋쟁이들의 유행을 주도하던 백화점들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고교 시절 농구 선수로 장안의 인기를 독점 하셨다고 어머니께서 자주 이야기 해 주셨다. 아버지께서 좋아 하시던 것들은 기린 맥주와 기꾸 마사무네(우리 말로 국화 향이 나는 정종이라는 일본 고유의 술 상표) 등 술과 담배 들이었다. 아버지의 취미는 음악과 등산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풍금(작은 리드오르간), 만돌린(Mandolin), 하모니카 등 악기들을 잘 다루셨다. 아버지께서는 빅타상표의 유성기(Victor record player)와 서도창, 경기민요, 신식 유행가류, 그리고 서양 고전 음악가들의 명곡 소품 등 꽤 많은 유성기 판(SP /Short play record)들을 수집하고 계셨다. 등산을 좋아 하시던 아버지께서 오르시던 산은 주로 금강산이었다. 어머니께서 틈틈이 정성스레 꾸리시던 당신 남편의 등산 배낭 속에는 기린 맥주 한 타스(24)가 필수였다. 어린 내 눈에 아버지의 등산복 차림은 너무도 멋있어 보였다..

혜화유치원

, 그 녀석 참 귀엽구나.” 원장 선생님께서 말을 이으셨다.

병철이는 형 하고 누나가 몇 명이나 있지?”

형은 하나고 누나는 둘이 있습니다.”

! 그래, 그러면 동생은 몇 명이나 되지?”

나는 점잖은 원장 선생님의 동그란 안경테 너머로 따뜻한 미소를 느꼈다.

남동생 하나와 여자동생 하나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무얼 하시고?”

화신상회에 다니십니다.”

형은?”

교동공립국민학교 1학년에 다닙니다.”

누나는?”

가끔 집에 오기 때문에 모릅니다.”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머니를 힐끔 처다 보았다.

“ . . . . . . . . . . . . . . . “ 어머니께서는 사랑스런 표정으로 눈을 흘겨 무엇인가 잘 못

되고 있음을 넌지시 알려 주셨다.

원장 선생님께서 하나 더 물으셨다.

병철이 집 주소는?”

경성부 돈암동 산 54번지의 5호입니다.” 자신이 있는 답변이었다.

이윽고 원장 선생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됐어요, 아주 잘 했어요,”

면접 시험이 끝난 것이었다.

안녕히 계십시오

원장 선생님을 뒤로 하고 나와서 문을 닫자마자 어머니의 매서운 꿀밤이 두 세 번 나의 머

리 위에 떨어졌다. 어머니께서 꾸짖으셨다.,

네가 누나가 어디 있어?” 잡고 가시던 내 손을 앞뒤로 흔드시면서 속상해 하셨다.

나는 도리어 목청을 높였다.

송숙이 누나 하고 금옥이 누나 . . . ”

그게 왜 네 누나니?, 동네 이웃 엄마 친구의 딸들을 거기 까지 가서 누나라고 하다니,

기가 막혀 죽겠네, 이제 유치원은 보나마나 다 떨어졌지 뭐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연습 할 때에 그런 거 왜 안 가르쳐 주었어?”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해서 나는 19423월에 혜화 유치원에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의 원장 선생님은 동성상업학교 교장 직을 겸직하고 계셨으며 후에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지내신 장면 박사였다.

혜화동

고요하기만 하던 손바닥만 한 혜화동 골짜기는 장안에서 동소문 고개(혜화동에서 삼선교로 넘어가는)를 넘나드는 길목으로 미아리, 의정부, 금강산, 원산, 함흥 등지로 연결되는 중, 동북행 간선 도로의 관문이었다. 북악산 자락은 울창하고 험준한 계곡 물살을 타고 내려와 성북동, 정능, 등 골짜기들의 절경을 이루었다. 그리고 맞은 편 멀리 수락산에서 떨어져 나온 낙산 자락과 만나면서 형성된 제법 큰 계곡을 따라 바로 이 간선 도로가 형성 되었던 것이다. 내가 일곱 살 때 서울의 인구는 12 만이었고, 그로부터 3년 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에 15 만이었다. 서울의 4대문 안은 장안이라 하였다. 4대문은 동대문, 남대문, 서대문, 그리고 동소문으로 애초에 북문이 없는 것이 무학 대사의 한양 도읍에 따르는 풍수지리설의 근간이었다. 경복궁 북으로는 삼각산, 북악산, 북한산 등이 3중으로 있어 자하문이 북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었다. 어른들 이야기 가운데 성균관(명륜동) 근처 길 가에 호랑이, 여우, 늑대 등 산 짐승이 자주 내려오니 해가 저물면 반드시 몇 사람이 함께 이 지역을 통과해야 된다라는 이야기를 더러 들은 적이 있었다.

인의동

인의동에는 나의 외가 집이 있었다. 인쇄소를 경영하시던 외할아버지 박종성씨와 외할머니 고영규씨는 슬하에 두 남매를 두셨다. 딸 박한라(나의 어머니)씨와 아들 박한수(외삼촌)씨의 나이 차이가 10여 년이 넘어 외할아버지께서는 그 사이의 자식을 고대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는 창신동에 작은 외할머니 댁과 나를 그토록 귀여워 해 주시던 광숙, 정숙, 창숙 등 세 이모들이 덤으로 있게 되었다.

교동공립국민학교~교동국민학교

어머니의 극성스러운 치마 바람이 혜화유치원에서 멎을 리 없었다. 엄격한 학군제하에서 인의동 외갓집으로 나의 주소를 옮겨 놓고 나를 교동공립국민학교에 집어 넣으셨다. 더러 인의동 외갓집에 머물면서 학교에 다니기도 했지만 때마침 신설된 종로 4종목()~삼선교 사이의 전차와 원남동~안국동 사이의 전기 버스를 갈아타고 다니던 교통수단도 나에게는 그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거리다. 드물게 걸어서 집에 갈 때 창경원 정문 앞에서 건달들의 꼬임에 빠져 포수장기를 두면서 장기를 잘 둔다는 말도 들어 보았다. 교동학교는 아주 좋은 학교였다. 나는 하야시 교장(일본군 소위), 고미야 선생(일본인 여교사, 2학년 때 담임), 이규백 교장(8.15 해방 당시 교장), 권진달 선생(5학년 때 담임) 등 나를 아껴주시던 분들의 가르치심을 지금도 모든 행동거지의 기초로 삼고 있다. 항상 공부를 뛰어나게 잘 한다는 소리를 들어오던 나는 4학년 가을 학기부터 골키퍼를 맡는 축구 선수가 되기도 했다.

소아마비

어머니, 학교에 다녀 오겠습니다’. 나는 댓돌 위에서 신발을 신자마자 이 말을 뒤로 하고 곤두박질 치듯 봉당 2 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마치 넘어지듯 앞으로 폭 고꾸라진 나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를 못 했다. ‘어서 일어나 학교에 가거라’. 대청마루에서 아침을 자시던 어머니의 말씀이셨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장난을 하는 줄 아셨던 모양이었다. 이때가 교동국민학교 5 학년, 622일 아침 8시경 바로 내가 소아마비로 전신불수가 되던 청천벽력의 순간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목, , , , 귀 이외의 어느 부분도 움직이지 못할 뿐 아니라 아무 감각도 없는 나를 업고 서울대학병원으로 달려 가셨다. 의사들은 미국(루스벨트 대통령)에나 있는 신종 병이 한국에 들어왔다며 신기하듯 나를 주물러 보았다. 아버지께서는 정성으로 나의 병을 고치신다면서 매일 아침 출근 전에 황금

(을지로 4)의 박주부 침술원, 재동의 계산당 한약국 등에를 번갈아가며 나를 업어다 놓으셨다. 집으로는 매일 이흥선(난쟁이 침쟁이) 의원을 비롯하여 몇몇의 장안의 명의라는 분들이 매일 왕진을 하셨다. 전답의 상당 부분이 나의 병 때문에 팔렸다. 2년이라는 세월이 다 되도록 병세는 좀처럼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의 움직임이 어머니의 눈에 포착 되었다. 그 날도 어머니께서는 매일 하시던 양으로 나의 등 뒤에서 전신의 근육을 맛사지하면서 뼈마디들을 접었다 폈다 하는 운동을 간단없이 되풀이하고 계셨다. 자식의 병을 고치시겠다는 일념에서였을까? 어머니의 관찰력은 나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의 정말 아주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찾아 내셨다. 왼손 엄지, 오른손 엄지 둘째 마디, 왼손 엄지 둘째 마디, 오른손 둘째손가락 뿌리 마디 . . . . 이런 순서로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느린 속도로 78세인 오늘날 까지 65년간에 걸쳐 내 몸의 마비는 서서히 풀리고 있지 않은가? 비록 어머니의 부축을 받아서였지만 소아마비 1년 반 만에 일어섰을 때의 감격을 무엇에 비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누구에게든 일으켜 세워 달라 해서 벽 같은데 기대 서 있는 연습을 부단히 했다. 무릎, 발목, 발가락 등의 마비가 아직 풀리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사실상 나는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릎을 뻗정다리 모양으로 곧게 펴서 벽에 기댄 채 그 긴장으로 서 있는 것 같이 보일 뿐 무릎 아래쪽의 모든 뼈마디의 힘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힘 없는 무릎을 조금이라도 굽어 볼 양이면 내 체중은 어김없이 발목을 겹 지르며 온 몸을 주저앉게 하였다. 그래서 내 양쪽 발목 전면과 복사뼈 사이는 항상 크고 시뻘겋게 부어 있었고 그 후유증으로 아기의 주먹만한 힘살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나는 월반 시험을 치르고 교동학교 5학년 가을 학기에 복학했다. 그러니까 세 학기를 쉰 셈이다. 친구들의 극진한 도움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학교생활은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아이들 하고 함께 뛰어 놀지는 못 했지만 그저 걷는 것만이라도 끔찍이 고마웠다. 공부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서 6학년이 되었다.

보성중학교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1950, 당시의 입시제도는 이승만 대통령의 교육정책 목표였던 체력은 국력이다를 반영하여 100미터 달리기를 필수로 하고 있었다. 나는 잘 걷지도 못하는 나를 총점 합100등 이내에 들어서 뽑아 주었다는 보성중학교(서원출 교장)에 대해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4월 초에 시작하는 봄 학기에 지오오디 엠오알엔이엔지 굿 모닝(Good morning) 정도가 겨우 입에 붙으려던 625일에 날벼락이 치기 시작했다.

6. 25

전쟁이 난 것이다. 멀리 은은하게 들리던 포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초라한 피란민의 행렬이 길을 가득 메우더니, 사흘 후 28일 새벽 6시 경에 인민군 탱크부대가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장안에 입성하는 것이었다. 동네사람들은 모두 불안에 떨며 안절부절,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 댔다. 그 날 아침 10시 좀 넘어서 다발총을 멘 인민군 장교와 내무서원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곧바로 아버지께서 숨어 계시던 다락을 향하는 것이었다. 할머니께서 남의 집 안방에 신발을 신은 채 들어오는 무례한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하시며 막아서시자, 장교가 동무, 비켜서지 못하오?’ 라고 고함을 지르며 할머니를 밀쳐버리고 다락문을 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최익상 동무, 나오시오하며 공포 두 발을 쏘았다. 둘은 아버지를 앞세우고 등에 다발총을 겨눈 채 어디로 인지 사라졌다. 올해에 105세이신 나의 아버지, 아직도 살아 계실런지 . . . . . . 충격을 받으신 어머니께서도 몸져누우셨고

한 살 위 형(당시 16)은 남은 가족이 염려스러워 민청(민주청년 연맹)에 가입했다. 그러나 당장 호구지책이 문제였다. 반동분자(지주)의 집이라 식량배급도 받지 못했고 별안간 때를 만나 우쭐대는 패거리들이 손가락질하는 꼴이란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어머니께서 내놓으신 패물이며 재봉틀이 쌀 몇 되 밖에 안 되는 헐값에 팔려 나갔고 우리 아홉 식구의 배는 점점 더 고파왔다. 나는 콩을 볶아서 팔아 살림에 보태보려 했으나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대구 팔공산, 낙동강 하구 까지 진격해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던 전세가 질질 끄는 것이 무엇인지 잘못되는 모양이었다. 인민군이 후퇴한다는 소식도 없었는데 간단없는 포성과 더불어 서울 한 복판 군데군데 포탄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9. 28 수복

맥 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 서울이 수복된 것이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우리 집의 생활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이때 우리 식구는 친할머니, 외할머니, 어머니(1992/3/17 별세). 형 병덕, , 아우 병호(1994/3/19 사망), 누이동생 혜경, 혜영, 혜정, 그리고 일 하는 언니 연옥 등 모두 열 명이었다. 형은 민청에 가입했다는 빨갱이 죄목으로 성북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나는 불편한 다리를 끌고 몇 차례 면회를 갔었다. 형은 원래 건강하지 못한 작고 가냘픈 체구가 모진 고문과 굶주림에 시달려 참담한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리고 형은 이곳에서 당시에는 불치병이라 일컬어지던 늑막염을 앓기 시작했다.

1. 4 후퇴(1951)

평양을 거쳐 압록강 변 혜산진 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하고 있던 유엔군과 한국군이 중공군의 참전, 반격에 부딪혀 불과 석 달 남짓한 아흔 여드레 만에 서울마저 내주고 대전 까지 남하를 거듭하고 있었다. 미국의 정정은 루즈벨트에 이어 새로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우어와 맥 아더 원수간에 불화설이 나 돌고 대전 전투에서 중공군에 의해 생포된 딘 소장 등 숫한 악재가 연발했다. 급기야 아이젠하우어 대통령은 유엔군 사령관 맥 아더 장군을 해임하고 한반도의 전쟁을 축소하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이 피란이라고 가려 했던 곳은 경기도 안성 근처였다. 만 한 살이 채 안된 막내 혜정이를 업고 유모차 바퀴 위에 사과 궤짝 등 막 널판으로 급조한 엉성한 수레에 이불, 옷가지 들을 싣고 가장인 내가 끌고 병호가 밀고 다른 모든 식구들은 각기 자신에게 맞는 궤나리봇짐을 하나씩 둘러메어 그럴듯한 피란민의 행색은 갖췄다. 시원치 않은 나의 느린 걸음걸이 때문에 우리의 피란은 무척이나 더딘 것이었다. 하루 종일 걸었으나 목표의 반이나 왔을까 싶은 어느 촌부락 앞 길거리에서 눈을 붙이고 새벽에 보니 천지가 중공군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체격이 아주 건장한 나의 걸음걸이를 주의 깊게 보더니 서울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모두가 위장 술로 눈 위에서의 보호색인 어머니, 할머니의 흰 치마를 하나씩 뒤집어 써야 미군의 공습을 피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죽음 앞의 공포! 귀경길

우리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습을 받았다. 마치 우리가 저들의 목표물인양 비행기가 우리를 향해 급강하하면 우리는 각자 제자리에 흰 치마를 뒤집어 쓴 채 가만히 앉고 비행기가 우리를 지나 올라가면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어머니께서는 모두 무사하니?’라는 말씀으로 인원점검을 하셨다. 말죽거리를 훨씬 지나 금호 나룻 터를 향해 한강의 얼음 위를 건너오던 중에 당했던 여섯 번의 공습은 참으로 아슬아슬한 것 이었다. 우리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부상자들의 간장 끊는 신음소리와 무수히 나뒹구는 시체들을 뒤로하고 기적적으로 무사하게 강을 건너 얼어붙은 모래사장에 올라설 수 있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왜 싸우는가?

빨갱이(?)와 파랭이(?)가 싸우는 와중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형이 그 틈바구니에서 이쪽 저쪽의 죄목으로 감옥살이를 하고, 죽음 앞을 무수히 뚫고 아홉 식구를 이끌고 느릿느릿 수 백리 길을 걸어 피란이라고 가다가 돌아온 소아마비 중환자의 내 신세 . . . . .감히 내가 살던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우리 식구들 모두는 우리 집이 무섭고 싫었다. 당시 서울 시내는 90% 이상이 빈 집들이었다. 우리는 혜화동 근처에 임시로 살 집을 정하기로 했다. 종로구 명륜동 1206-38, 바로 이 집이 우리가 고른 빈집이었다. 한옥 치고는 꽤 큰 근대식 구조로 된 집이었다. 건너 방에는 새로 인쇄된 이해남 편의 영한사전이 가득히 쌓여 있었고 서가에 고급서적으로 보이는 많은 책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집은 대 영문학자 이해남씨의 소유임을 알 수 있었다. 뒷곁에 새끼줄에 엮어 죽죽 늘어뜨린 무청우거지쓰레기를 삶아 며칠을 연명했다. 풀 만 먹어서였는지 동생들 네 명 모두가 누렇게 뜨고 붓는 증세를 보였다. 그러나 그 무청쓰레기가 없었더라면 그 배고팠던 며칠을 어떻게 지냈을까? 이루 장차 먹고 살 일이 큰일이었다. 다리병신인 나는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는 이점이 있었다. 동정을 살피던 중 좋은 일거리를 하나 찾아냈다.

직업(?) 전선에

나는 나의 충실한 조수 병호(아우)와 함께 그 추운 겨울에 창경원 정문 앞에서 스케이트 날 갈아주는 품팔이로 우리 식구들이 겨우 연명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었다. 창경원의 얼음이 녹자 먹고 살 일이 또 큰 걱정이었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라는 속담을 뇌까리면서 생각해 낸 일은 중공군을 상대로 한 담배 장사였다. 형의 병세는 점점 나빠졌다. 나는 건너 방 서가 한 귀퉁이에 놓여 있는 이해남씨의 손 떼가 묻어있을 것 같은 화투 한 벌과 카드 한 벌을 들고 거리로 나갔다. 혜화동에서 창경원 앞을 지나 원남동과 종로 4가로 향하던 중 때마침 전매청(동대문 경찰서 맞은편)에서 리어카에 보급 받은 담배를 싣고 나오던 두 명의 중공군 병사들을 만났다. 나는 화투와 카드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잠시 갸웃거리던 그들은 나에게 장수연(종이에 말지 않은 담뱃대 용 잎담배) 여섯 봉과 바꾸자고 손짓으로 의사를 표시했다. 나는 너무도 기뻤다.

담배공장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께서 피시던 담배를 말아드리던 서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네 살짜리 혜영이와 한 살짜리 혜정이를 빼고 나머지 온 가족이 동원됐다. 조그만 나무상자에 조잡하게 만들어진 외할머니 담배 마는 기계와 붓대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건너 방에 무진장 쌓여있는 영한사전을 파기하여 그 종이로 담배를 말아내는 것이 전 공정이었다. 장수연 한 봉으로 담배 80여 개비를 말아내는데 성공한 우리는 신문지를 재단해서, 밥풀칠을 해서 담배 갑을 만들고 스무 개비씩 담고 보니 모두 스물 네 갑의 담배를 생산한 셈이 되었다. 나는 담배를 목판에 담아 들고 혜화동 우체국 정문(당시에는 큰 길 쪽을 향하고 있었음) 앞에 난전을 차리고 본격적인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 장수연은 한 봉에 빨간 돈(당시 북한의 화폐로서 한화에 비해 1;1.000로 강세였었음)으로 5원이었고 우리 공장 제품은 한 갑에 20원이었다. 대부분 상대는 중공군이었다. 중공군들은 우리 제품 한 갑과 장수연 네 봉을 주고 바꾸는데 조금도 서슴지 않았다. 우리 공장의 인건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16배의 장사인 셈이다. 당시 여건 속에서는 고소득(?)이었을까? 그들은 보급 받은 장수연을 신문지를 찢어 거기에 침칠을 하면서 말아 피우는 것이 귀찮아서였는지, 아니면 영한사전의 종이가 맛이 좋아서였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가 목구멍에 풀칠하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곡식과 나이드라이지드, 하이드라이지드, 파스 등 형에게 필요한 약간의 약을 살 정도의 생활은 유지케 해주었다.

중공군의 후퇴

대전 근처 까지 밀려 내려간 국군과 유엔군이 전세를 가다듬어 역공을 개시하여 양측이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유엔군 소속 미제2기갑사단장 딘 소장이 중공군에 의해 생포 되었고, 사단기를 빼앗기는 등 콧대 높은 미군이 크게 망신을 당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중공군의 인해전술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출격하는 미 항공기들의 폭격과 포화의 화력에 부딪쳐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면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군복은 전투복으로 국방색과 그것을 뒤집어 입으면 눈 위에서 위장하기 위한 흰색이 되는 두 가지 이외에 검정 색이 있다. 검정 색의 중공군이 주로 하는 일은 전사한 시체를 운구하는 것이다. 이들은 41조가 들 것 하나씩을 사용하여 시체를 운구하는 특수부대, 군인인지 군속인지는 모르지만 똑 같은 군복인데 색깔만 다른 것이었다. 거리에 이들이 많이 얼쩡거리는 것을 미루어보아 중공군의 전황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2월 중순 들면서 밤에만 주로 활동하던 이들이 낮에도 많이 보이더니 중공군이 춘기 대공세를 위해 작전상 후퇴를 한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들려왔다..간단없이 들려오던 포성이 점점 커지더니 서울 도심에도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9.28 수복 당시 인천 앞바다에서 한미 연합군의 상륙을 위한 함포사격의 기억을 되살리는 공포의 포성이 10여일 이상 계속되고 있었다. 혜화동, 명륜동 거리엔 후퇴하는 인민군과 중공군, 그리고 수많은 부상병과 시체를 운반하는 검은 색깔의 들것 부대의 움직임이 분주하고 민간인은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식량이 떨어진지 닷새가 되자 배고파 칭얼대던 어린 동생들의 울음소리조차 사라지고 식구 모두가 기진맥진해 쓸어졌다.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집을 박차고 나와 혜화동 로타리 주변을 살펴보았다. 내무서(혜화동 파출소)의 경무원(헌병? 경찰?)들과 혜화동 일대의 포로수용소(혜화동에서 성북동에 이르는 넓은 지역의 민가들이 미군 포로수용소였음)를 지키던 경비병들이 포로들의 대열을 이끌고 철수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 경무원들과 경비병들은 나의 담배를 사서 피우던 단골손님들이였기에 나와는 잘 아는 터였다. 그런데

동무, 내무서로 가기요(갑시다의 함경도 사투리).” 나와 우리집 걱정을 가장 많이 해주던 경무원이 다발총구를 내밀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도 놀라 허둥지둥하는 나에게

동무, 내 말 안 들리오? 내무서로 가자하지 않소?”

내무서 안에는 부상 정도가 심한 미군 포로 10여명과 그들을 부축할 피납자로 보이는 몇 사람들이 있었다. 그 경무원은 나에게 이들 대열의 선두에서 미군 비행기가 오면 양손을 흔들며 수유리 방면으로 피난 시키라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이 다리를 이끌고 어떻게 갈 수 있겠어요?” 소아마비로 여러 고비를 넘긴 터라

잘 아시면서. . . .”

죽든지 걷든지 하란 말이오.” 경무원은 다발총을 흔들어 대며 언성을 높였다. 우리 대열은 다발총을 든 경무원 셋을 포함해 25명의 2열 종대였다. 혜화동을 떠나 미아리 고개 꼭대기를 넘어서면서 오른쪽은 지금의 미아삼거리 일대에 이르도록 온통 공동묘지였다. 그리고 그 맞은편은 논밭과 야산이 드문드문 두어 채씩 박혀있는 농가(초가)들과 어우러지는 한 폭의 우리의 옛 농촌 풍경화였다. 느린 내 걸음으로 네 시간 반 만에 도달한 곳은 수유리 화계사 위쪽 야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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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병철 이야기3 admin 2015.06.26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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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철 이야기1 admin 2015.05.27 454